쇼트트랙 박지원 “후배 황대헌이 먼저 사과, 선배라면 받아줘야죠”


쇼트트랙 국가대표 박지원이 지난 2일 스케이트를 들고 자세를 취했다. 스케이트 발목에 그의 영문 이름이 적혀 있다. /남강호 기자

그는 올해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다. 남자 쇼트트랙 국가대표 박지원(28·서울시청). 지난 2월 월드컵 대회에서 2년 연속 ‘크리스털 글로브(월드컵 종합 랭킹 1위에게 주는 상)’를 차지했다. 세계 최강자 자리를 굳히는 듯했다.

그 여세를 몰아 출전한 3월 세계선수권. 여기서 대표팀 후배 황대헌(25·강원도청) 반칙에 넘어지면서 ‘노 골드’ 수모를 맛봤다. 이전 세계선수권 2관왕 업적도 빛이 바랬다. 우승했다면 차기 시즌 국가대표 자동 선발권을 받았을 텐데 이마저 놓쳤다. 넘어질 때 충격으로 목 부상마저 입었다. 황대헌이 과욕을 부려 ‘팀 킬(Team Kill)’을 했다는 논란이 커졌다. 목 보호대를 한 채 귀국했지만 둘 사이 화해 분위기는 없었다.

박지원에겐 선수 생명이 흔들릴 수 있는 위기였다. 대표 선발전을 통과하지 못하면 20대 후반인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병역 혜택 기회인 내년 하얼빈 동계 아시안게임 출전이 무산되기 때문이다. 그 경우 군 입대를 해야 해서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 출전도 힘들어질 수 있었다.

어수선한 가운데 그는 지난달 대표 선발전에 나섰다. 1위를 하면서 다시 태극 마크를 달면서 재차 기회를 잡았다. 이 선발전에서도 황대헌과 또 부딪혀 악몽을 재현했다. 박지원은 선발전이 끝나고 “지금까지 사과의 뜻을 전달받은 게 없다. 사과를 받아줄지 천천히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불쾌한 기색이 보였다.

그러던 지난달 22일 황대헌이 찾아왔다. 지난 일을 사과하고 다시 ‘원 팀’으로 잘해보자는 간청을 담았다. 박지원은 서운했던 앙금을 털어버렸다. 세계선수권 기간 둘은 별다른 대화도 없었다고 했다. 지난 2일 본지와 만난 그는 “중요한 건 당장 내가 해야 할 일, 즉 대표 선발전 준비였다”며 “선발전이 끝나기 전까진 그 일에 대해 생각하고 감정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박지원(왼쪽)과 황대헌이 지난달 22일 만나 그간의 감정을 풀었다. (라이언앳 제공)

“대헌이가 진심으로 사과를 했어요. 후배가 사과를 했기 때문에 선배로서 당연히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를 보고 따라오는 후배들을 위해 좋은 모습 보이자는 얘기를 했어요.”

그는 2015년부터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각종 국제대회에서 100개 가까운 메달을 땄다. 그런데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과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당시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했다. 대표팀에서 함께 뛰던 임효준(린샤오쥔)과 황대헌이 금메달을 목에 거는 모습을 TV로 지켜봐야 했다.

박지원은 “지난 두 번 올림픽 때는 간절함이 컸다. 그게 오히려 독이 됐던 것 같다”며 “이제는 마음이 가볍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하늘이 올림픽이라는 기회를 줄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올림픽 무대도 중요하지만 월드컵 시리즈라도 매 경기가 저에겐 소중합니다. 한 경기씩 집중해서 노력했더니 어느새 크리스털 글로브가 2개나 제 옆에 있잖아요. 이 마음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픽=정다운

어느덧 국가대표 고참이 된 그는 아시안게임 출전 경험도 없다. 2021년 기회가 있었는데 코로나 사태로 대회가 취소됐다. 이제 내년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을 겨냥하고 있다. “처음 나가보는 무대라서 재미있을 것 같다”며 “병역 혜택이라는 중요한 일이 걸려 있지만, 그걸 생각하고 경기하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다. 최선을 다해서 완주하면 어떤 결과가 있어도 만족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아시안게임을 도약대로 2026 동계 올림픽에서 진정한 세계 정상 자리에 서는 게 꿈이다.

그는 외국 선수들보다 왜소한 신체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쉴 새 없이 경기 영상을 보면서 자신과 상대 선수들을 분석한다. 빙판 코너에 놓는 블록 위치까지 살펴가면서 매 레이스 다른 전략을 들고나온다.

박지원은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선수 생활을 시작한 이후 처음 성인 국가대표에 뽑힐 때까지 아버지가 모든 훈련장과 경기장을 따라다니며 그의 영상을 찍어서 보여줬다고 한다. 쉽게 구해볼 수 없던 외국 경기 영상도 구해줬다. 박지원은 어린 시절부터 만화나 예능 같은 TV 프로그램 대신 쇼트트랙 영상을 보는 게 일상이었다. 그는 “얼마 전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 BMW 승용차를 선물해드렸다”고 했다.

지난달 한 시즌을 마치고 그는 부상 치료와 학업, 취미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세계선수권에서 황대헌과 부딪혔을 때 얻은 신경통은 아직 온전치 않다. 모교인 단국대 스포츠과학대학원에서 스포츠 마케팅 관련 석사과정도 밟고 있다. 석사를 마친 뒤엔 박사과정을 밟을 계획이다. 그는 “여러 길을 많이 열어놔야 한다고 생각해서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취미는 사진 찍기. 일상의 순간들을 카메라에 담는 걸 좋아한다고 한다. 함께 운동하는 동료들 모습도 많이 찍는다. 그는 “쇼트트랙 선수 박지원임을 밝히지 않고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려볼 계획”이라고 했다.

박지원은 “처음 국가대표가 됐을 때 외국 선수들에게 내 이름 석 자를 알리는 게 목표라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며 “이제 그 목표를 이뤘으니, 세계 정상 자리를 최대한 오래 유지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박수 칠 때 떠나기보다는 힘이 다해서 쓰러질 때까지 달리고 싶어요. 유능한 후배들이 언젠가 저를 이기고 정상에 오를 때 진심으로 축하해주면서 내려오는 게 제가 그리는 선수 생활의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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